매실로 농업의 패러다임을 창조하다

서정현 | suh310@joseplus.com | 입력 2017-04-28 06: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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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 (Free Trade Agreement 자유무역협정)로 인해 수입 농산물이 크게 증가하면서 우리 농업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농업 강대국의 농산물이 관세 없이 수입되어 우리 농산물의 경쟁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은 고품질의 안전한 농산물 즉, 친환경적 유기농법 및 생산이력제 도입 등을 통해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존의 농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단순 식량 생산을 뛰어넘어 농촌 고유의가치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화·관광과의 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를 실현하기위해 ‘6차 산업1)’을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수십여 년 전에 이를 준비해서 6차 산업을 달성하고, 농업의 패러다임을 창조한 농민이 있다.
홍쌍리, 이 이름 석 자는 세계 최고의 매실 브랜드로 통한다. 홍쌍리 여사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14호이자 국내 최초의 식품명인이다.


광양시 다압면 4만 7천여 평의 산비탈에 4,500여 그루의 매실나무를 심고, 매실장아찌, 매실농축액 등 30여 가지의 매실 제품을 개발하여 대통령상 수상(1998), 석탑산업훈장 수훈(1998), 한국전통식품베스트5 선정(2004), 백만 불 수출의 탑 수상(2008), 농촌 융복합 산업사업자 선정(2015), 도전 한국인 10인 대상(2016) 등 농업과 제조업, 문화관광 분야를 넘나드는 6차 산업의 성공모델을 제시하였다.


1966년 홀로 시작한 매실농사는 섬진마을에 이어 다방면으로 확대되고, 급기야 광양 전체로 파급되어 매실농사 비중이 지역 농사의 전체 소득 중 20%를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광양시는 ‘매실원예과’를 신설하는 한편, ‘매실 지리적 표시제’와 다수의 매실 특허 등록 등의 매실 특성화 정책으로 2008년 국내 최초의 매실산업특구로 지정되었다.


이로 인해 섬진마을은 ‘매화마을’이란 새 지명이 생기고, 매실농사는 하동, 순천, 구례, 남해, 해남 등 남해안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한 매실농사가 대한민국 농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95년 시작한 ‘광양 매화축제’는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축제로 발전하여, 민간축제 사상 한 달 최다 관광객(65만여 명)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축제를 시작한지 2년 만의 일이다. 2000년대부터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전라도 대표축제로 성장하였다. 

이는 광양시 추산 281억원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2,000여 명의 고용창출 효과에 달하는 성과이다.


‘매실은 체내 독소를 없애주는 천연 청소기다. 매실로 뱃속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


매실은 배앓이약 대용 외에는 쓸모없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밤농사와 매실농사를 지으면서 터득한 것이 있었다. 1978년 36살에 찾아온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였다. 홍쌍리는 목발을 짚고 겨우 걸을 수 있었고,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아 밥을 떠먹을 수 없었을 정도로 통증이 심한 고통받는 환자였다. 어느 한의사에게 매실 발효액을 추천받았다. 매실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매실이 그런 효과까지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하루 2리터씩 2년 반 동안 꾸준히 복용했더니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다.

 

 

 

매실은 만병통치약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매실을 추천했다. 이러한 직·간접적인 매실 체험을 통해 홍쌍리는 매실나무에 명운을 걸었다. 매실의 효능을 직접 경험하고 약으로만 사용할 게 아니라, 어떻게든 밥상에 올려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첫 번째 도전은 ‘매실장아찌’였다. 당시에는 매실을 반찬으로 사용한 전례가 없었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상차림에 대한 시어머니의 반대까지 겹쳐 아무도 모르게 실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틈날 때마다 별별 가지 재료와 방법으로 시도하기를 4~5년, 드디어 매실장아찌 개발에 성공한다. 그 이후로 매실고추장, 매실된장, 매실절임, 매실발효액, 매실농축액, 매실아이스크림, 매실초콜릿 등 30여 개의 매실 제품을 개발하고, 제조법을 특허출원했다. 또한 ‘매실씨 베개, 매실씨 삽입 요’ 등의 실용신안등록을 냈다.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홍쌍리만의 창의 작품이다. 국내 최초로 전통식품 명인에 지정(1997)된다.


먹거리(매실)에 볼거리(매화)와 스토리(詩)를 융합하다
그녀는 농사=관광=스토리텔링이라는 새로운 등식을 만든 최초의 농민이다. 이것은 2010년대 새로운 국정과제로 떠오른 6차 산업과 맥을 같이 한다. 홍 여사는 ‘농사는 문화’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실제 자신을 매화 천국으로 안내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무소유』의 저자 불임암의 법정 스님이라며 사연을 소개한다.


“보살아, 저 산꼭대기에 매화나무를 많이 심어서 이곳을 꽃 천국으로 만들어라.” 이에 홍쌍리는 손사래를 치며, “스님, 산꼭대기는 오르내리는 것조차 힘든데,매화를 심어놓으면 어떻게 그곳까지 무거운 거름을 이동하고, 또 매실을 따가지고 내려올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법명 높은 스님의 조언에 창의적인 홍쌍리는 스님의 선견지명을 곰곰이 되새겨보고, 고통 속에서도 저 악산을 꽃 천국으로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로부터 밤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그 자리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꼬박 4년 7개월이 걸렸다.


홍쌍리가 매화나무를 심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7년을 살았던 도시 처녀가 어느 날 갑자기 귀신만 살 것 같은 산골에 시집을 왔으니, 대도시의 장터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 살던 모습이 그리웠다. 부산 국제시장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는 매화마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다.
 

홍쌍리는 “일주일간 피고 지는 ‘벚꽃축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한 달 가는 ‘매화축제’에 왜 안 오겠냐?”는 반문이다. 더욱이 그즈음의 섬진강변은 꽃축제 시즌이다. 매화축제(3월 중순)를 필두로 산수유 꽃축제(3월 중하순) → 벚꽃축제(4월 초순) → 진달래축제(4월 초순)〉 → 철쭉제(4월 말) 등 꽃축제의 파노라마이다.

 

“인간의 지식보다 자연의 지혜에서 배워야”
홍 여사도 그러한 말들이 습관처럼 입에 배었다. “나는 산에 오를 때마다 고맙다. 흙이 있어서 고맙고, 열매가 있어서 고맙고, 물이 있어서 고맙다.”어떻게 이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에 홍여사는 “나는 눈이 6개다. 앞도 둘, 옆도 둘, 뒤도 둘이다. 내 일생은 출근도, 퇴근도, 정년퇴임도 없는 52년 머슴살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농사가 참 행복하다.내가 90살까지 살 수 있다면 진정한 매화 천국을 만들고 떠나고 싶다. 나를 농사꾼으로 만들어준 시아버지
은혜에 늘 감사한다.”고 했다.


또한 “먹는 음식에 따라 사람의 성격도 바뀐다. 그래서 밥상 위에는 꼭 김치, 된장, 고추장, 간장을 올려야 한다. 그리고 이를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면 좋겠지만,적어도 그 맛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길 바란다. 그 이유는 음식 하나에 세상의 이치가 고루 담겨 있다. 그 발효식품이 바로 조상들의 철학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밥상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더불어 “나는 못 배운 농사꾼이오. 도시 사람들이 봤을 때는 내가 촌놈이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실은 네가 촌놈이다. 도시 사람들은 화려한 것만을 좋아하지, 화려한 것보다 자연이 더 귀한 것도 모르고….” 그녀는 인간의 지식보다 자연의 지혜에서 배울 것을 주문한다.

 



창의는 “인생의 다양한 파도를 넘고, 고향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시부모를 모시고, 병든 남편을 수발하고, 아이 셋을 키우면서, 또 빚에 시달리고 매일 아픈 몸과 싸우면서,밤나무를 베고 매화나무를 심고 수천만 번 산비탈을 오르내리면서, 매화를 꽃 피우고, 매실 먹거리를 개발하고, 시를 쓰고, 지인들과 동네 노인들과 어려운 어린이들까지 보살피는 삶, 그 삶이 파도와 같은 인생이 아니겠는가.


온갖 역경과 시련을 통해 인생의 파도를 맛보았던 홍쌍리, 꽁꽁 얼어붙은 눈 속에서 피어난 매화처럼, 경쟁 속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잊고 사는 도시 사람들에게 매실 건강과 매화 천국을 선사한 아름다운 농사꾼으로 남을 것이다. <글/ 김경수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미디어예술공학교수>

 

[저자 프로필]

DDL(Digital contents Development Laboratory)이란 연구실을 만들고 11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주말, 방학 없이 디지털콘텐츠 분야 공모전에 도전하여 200여건의 수상과 낙선을

경험하면서 창의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이제까지 강연 200여회와 개인전시회 7회,저서 11권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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