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칼럼] ‘엿장수 개헌’ 안 된다
- 편집국 | news@joseplus.com | 입력 2017-11-14 09:33:31
길거리에 지게를 지거나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엿장수가 다니던 시절의 우스개 퀴즈가 있다. ‘엿장수가 하루에 가위를 몇 번이나 칠까?’라는 물음이다. 그게 난센스 퀴즈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니, 질문을 받은 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세어봐야 알 거 아니냐는 등 반문이 이어지지만 출제자는 그저 웃는다. 그러다가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정답이 밝혀지면 서로 파안대소를 하고 즐거워한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들이 한 목소리로 약속했던 ‘개헌’ 공약이 또 다시 헛말이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져가고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 한풍 앞에 여야 정당들이 온통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개헌’에 대한 의지는 점점 더 흐릿해져가는 추세다. ‘개헌안’ 마련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여당도 내부적으로 중구난방이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내년 6월 개헌에 아예 반기를 들고 나선 모양새다.
‘개헌’ 대선공약 또다시 헛말이 될 가능성 높아져
더불어민주당 내 의원들은 대체로 4년 중임 대통령제에 찬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자루를 잡고 나니 기류가 바뀐 모습이 살짝 얼비친다. 자유한국당이나 국민의당 등 야당은 의원내각제를 일부 적용한 혼합정부제가 다수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원혜영 위원장은 한 라디오에 출연해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분권형을 강화하느냐, 아예 혼합정부제나 내각제로 가느냐를 두고 정확하게 의견 수렴이 안 돼 있다”고 고백했다.
더불어민주당 내에 존재하는 ‘과욕’도 큰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크다. 민주당은 헌법 전문에 5.18 민주항쟁을 비롯해 부마항쟁, 촛불혁명 등을 담자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기본권과 관련해서는 시대 변화에 따라 안전권, 아동·노인·장애인 권리 강화, 정보 기본권, 정정보도 청구권,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소비자 권리 강화 등을 포함하자는 쪽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정권을 잡은 이후 권력의 관성이 작용한 결과물로 읽힌다.
![]() |
▲안재휘 본사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
온갖 주장 다 넣자는 건 반대세력에 빌미만 줄 따름
집권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야당 시절의 입장을 망각하고, 개헌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끌고 가려고 하는 행보를 보여서는 안 된다. 헌법 전문과 기본권 조항에 자신들이 추구해오던 온갖 주장들을 다 집어넣자고 하는 것은 개헌 반대 세력들에게 빌미만 줄 따름이다. 헌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사사로운 이해관계만을 앞세워 어림셈을 하고 있는 정치로는 곤란하다. 국가의 백년대계가 담긴 헌법을 생각해야 마땅하다.
권력구조에 관한 청와대의 속내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연방제에 준하는 지방분권’이 문재인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만큼 ‘지방분권형 개헌’에 대해서는 가장 의지가 굳어 보인다. 안철수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당은 ‘개헌’을 ‘선거구제 개편’과 맞물려놓고 있다. 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는 동력을 ‘개헌’ 협상에서 찾겠다는 의도가 뚜렷하다. 문제는 개헌안 국회 의결정족수 2/3의 키(key)를 잡고 있는 자유한국당의 태도다.
홍준표, 주요 개헌이슈에서 주도권 놓칠까 우려하는 듯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내년 지방선거에서의 개헌 국민투표에 대한 반대 입장을 거듭 피력하고 있다. 홍 대표는 며칠 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개헌 내용은 어차피 여야 합의가 돼야 한다”면서 “지방선거에 붙인 곁다리 국민투표는 옳지 않다”고 밝혔다. 홍 대표는 지난달 16일 울산 남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국시장·군수·구청장 협의회 정기총회에 참석해 지방분권개헌 양당대표 특별강연에서도 비슷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홍 대표의 발언을 종합하면 ‘개헌’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시기적으로 지금은 아니라는 논리인 것 같다. 그러나 경남도지사를 역임해 ‘지방분권 개헌’의 절박성을 모를 까닭이 없는 그의 언행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국민지지가 높은 진보정권 초기에 개헌을 서두를 경우, 권력구조를 비롯한 주요 개헌이슈에서 주도권을 놓치고 끌려가게 될 우려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이 가는 대목이기는 하다.
당리당략 휩쓸린 소인배 정치놀음 속 ‘개헌’ 악용 거듭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한국당이 ‘지방분권’마저도 정치공학적 셈법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지방분권 개헌’에 대한 미적지근한 전략으로는 자칫 ‘게도 잃고 구럭도 잃는’ 참담한 사태를 맞을 수도 있음을 한국당은 또렷이 기억해야 한다. 여야 이념의 차이를 떠나서 이 시대에 정말 중요한 가치를 지닌 테마들을 놓고 정치권이 진정성을 갖고 마주 앉아야 한다. ‘지방분권 개헌’은 그 중 대단히 중요한 주제에 속한다.
개헌은 다수 국민들이 오랫동안 갈망해온 국가 중대사다. 국민들은 그 동안 당리당략에 휩쓸린 소인배 정치놀음 속에서 ‘개헌’이 악용되는 모습을 오래도록 목도해왔다. 정치인들은 필요할 때 ‘개헌’카드를 약방의 감초처럼 정략의 도구로 써먹다가 때가 되면 ‘시간이 없다’면서 미루곤 해왔다. 이번에야말로 시대변화에 맞는 제대로 된 헌법을 만들어보자고 해왔는데, 막상 닥치니까 또 다시 속셈들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또 ‘정략재물’ 삼고자 하면 민심이 결코 묵과 않을 것
특히 전국에 살고 있는 지역민들은 개헌논의 과정에서 권력구조 논쟁에 묻혀 또다시 ‘지방분권 개헌’ 열망이 도외시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해왔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어 큰 걱정이다. “이제는 통일헌법을 만들어야할 시기이므로 헌법전문 개정과 권력구조, 지방자치 모두 개헌에 포함돼야 한다”는 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말은 옳다. 그러나 그래서 이번에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개헌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처리되는 것이 맞다. 지금부터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고 이견을 조율하고 최종안을 도출해내야 한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비겁하고 초라한 변명이다. 정치권에서 또 다시 ‘개헌’을 정략의 재물로 삼으려고 한다면 민심이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개헌’은 이제 정치인들이 마음대로 치고 놀아도 되는 ‘엿가위’가 아니다. ‘엿장수 개헌’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저작권자ⓒ 조세플러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헤드라인HEAD LINE
카드뉴스CARD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