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칼럼] 현장에는 ‘망각’이 있다(?)

김영호 기자 | kyh3628@hanmail.net | 입력 2017-11-30 12: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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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본사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공통적인 금언(金言)이 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세상 너무 많은 일들이 현장의 팩트(fact)를 무시하고 처리됨으로 인해서 중대한 시행착오를 일으키고 있다는 경계일 것이다. 큰 일이 일어날 적마다 지도층 높은 양반들은 앞 다투어 달려와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간다. 그리고는 끝이다.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문제가 어떻게 해결돼가고 있는지에 대한 백업은 느리고 더디고 감감무소식이다.


최근 판문점을 통해 귀순하다가 북한군의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은 북한 병사를 살려낸 아주대학교병원 중증외상센터 이국종 교수가 기자회견에서 격정을 토로했다. “환자를 치료하는 건 이벤트가 아닙니다. 지금도 목숨과 사투를 벌이는 이가 많습니다. 기자 여러분이 ‘환자가 깨어났나요.’, ‘무슨 얘기를 했나요.’ 이런 데 에너지를 다 쓰지 말고, 지엽적인 것만 보지 말고, 의료 현실의 백그라운드를 들여다보십시오.”


박수치고 돌아서면 그뿐인 현실, 더 방치해서는 안 될 고질병
이국종 교수는 ‘아덴만의 영웅’으로 불린다. 지난 2011년 소말리아 해적과 싸우다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을 기적처럼 살려낸 일로 얻은 별명이다. 그런 그는 의료계 일각에서 ‘쇼 닥터’라는 질시어린 비판도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쇼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한 것이 아닌 한 터무니없는 비난이다. 이국종 교수의 외침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증외상센터 운영을 전폭 지원해 인명을 하나라도 더 살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절규로 관련법이 마련되고 중증외상센터가 새로 생기고 하는 것을 보면 한국 의료현실 개선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드러나고 있는 속살은 여전히 모순투성이다. 자신이 일하는 중증외상센터에서 연간 10억의 적자를 내는 ‘죄인’이라는 놀라운 그의 자탄이 이를 대변한다. 박수만 치고 돌아서면 그뿐인 우리의 매너리즘은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중증외상’ 수준을 넘어 고질병이 돼가고 있다.

    
‘달’은 외면하고 달 가리키는 ‘손’만 보고 시빗거리 만들어내
그가 공개한 귀순병사의 기생충 이야기를 놓고 포퓰리즘에 목마른 한 정치인의 ‘인격살인’ 운운 티 뜯기로 나라가 시끄럽다. 지친 이국종 교수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말로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곧 죽을 지도 모를 환자를 살려낸 의사를 인격살인자로 몬 정치인이 되레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우리는, 튀는 발언으로 한 탕하는 일에 골몰하는 3류 정치의 추악한 일면을 또 한 번 목도하고 있다.

 
불의의 사고로 숨져가는 외상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이국종 교수의 주장은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치도 언론도 ‘달’은 외면하고 달 가리키는 ‘손’만 보고 시빗거리를 만들어내는 꼴이다. 이국종 교수로 인해 새로운 삶을 선물 받은 석해균 선장은 말한다. “하나하나 할 때마다 진심이 느껴지는 의사다. 이 교수에게 ‘쇼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죽다 살아온 내가 증인이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포항강진, 피해접수 2만여 건 조사는 하루 100여 건에 불과
‘현장’이 무시되는 어불성설은 포항 강진 현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진발생 열흘이 지났건만 피해현황 조사와 등급 판정 인력이 태부족해 문제가 심각하단다. 포항북구의 피해조사 접수건수가 모두 2만여 건에 달하는 상황에서 북구청이 운영하고 있는 6개 팀이 수행할 수 있는 조사는 하루 총 100여 건에 불과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같은 현장의 난제를 신속히 지원하지 않는 중앙정부는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볼멘소리가 쏟아진다.


지진 피해현장의 응급복구는 대부분 마쳤지만 피해정도가 행정적으로 확정되지 않아 근본적인 복구와 수리 작업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피해 주민들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힘든 이재민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처지다. 피해현황 조사와 등급판정은 피해복구와 이재민 관리, 향후 대책의 기초자료다. 무엇보다도 빨리 결과물이 나와야 후속대책이 착착 추진될 수 있다.


현재속도라면 단순 계산해도 피해 파악에만 200일 넘게 걸려
결국 포항 지진으로 발생한 이재민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기 전날인 지난 21일(1천71명)보다 오히려 200여 명이 증가한 1천285명(26일 기준)을 기록하고 있다. 피해 중심지역인 흥해읍은 수십 년이 지난 낡은 건물들이 많아 ‘또 지진이 오면 집이 언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인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이재민들의 수용소 생활이 장기화될 조짐마저 보인다.


현장사정을 참되게 살피지 않는 구태정치, 구태행정이 여전하다. 가장 양호한 피해가옥의 경우에도 피해정도 파악에만 최소한 15분이 걸리는 상황에서 현재의 속도라면 단순 계산으로만 따져도 9개월 가까이 걸리게 된다는 한심한 예측이 나온다. 각 지역에서 300여 명의 전문가가 업무를 돕고는 있지만, 이들은 급한 대로 거주 가능성 여부를 판단해주고 있는 정도에 머물러 모든 업무를 오롯이 포항시가 해결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활동홍보용 사진이나 찍고 잊어버리라는 말 결코 아닐 것
지진이 발생한 직후부터 경북 포항지역의 각 읍·면·동사무소는 ‘자연재난피해접수처’를 중심으로 지진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업무처리 인원이 턱없이 모자라 줄곧 어려움을 겪고 있단다. 특히 흥해읍사무소 민원봉사과는 몰려드는 이재민들로 민원실 20여 명의 직원들은 쇄도하는 이재민들과 문의전화로 다른 업무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포항시가 추가로 지원하는데도 넘치는 수요에 턱없이 부족하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은 현장에 찾아가서 활동홍보용 사진이나 찍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라는 말이 결코 아닐 것이다. 이국종 교수를 영웅으로 만드는 일은 결코 그가 바라는 핵심 원망(願望)이 아닐 것이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포항 강진 다음날 회의에서 “현장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진 피해당한 주민들이 울고 있는데, 인력이 모자라서 피해현황 파악과 피해 등급책정조차 늦어진다니 말이 되는가. 현장에 답이 있기는커녕 오직 현장을 잊어버린 ‘망각의 거품’만 맴돌고 있을 따름인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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