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칼럼] ‘보이지 않는’, 그러나 ‘보이는’ 손
- 편집국 | news@joseplus.com | 입력 2017-07-17 17:07:29
![]() | |
▲ 안재휘 본사 논설고문,
|
어느 날은 국군이 지나갔다가, 또 며칠 뒤 인민군이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위태로운 마을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태극기와 인공기를 함께 만들어서 국군이 지나갈 때는 태극기를, 인민군이 나타날 때면 인공기를 들고 나가 흔드는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국군의 반격에 황급히 북쪽으로 철수하는 인민군이 태극기로 위장을 하고 지나가는데 이를 알 턱이 없는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섰다가 그만 따발총 사격을 받게 되고 만다.
영화의 한 장면이었는지 소설의 한 대목이었는지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그런 애사(哀史)를 접한 경험이 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민중의 삶이란 그렇듯 강자 앞에서 나름대로의 다양한 요령으로 생존을 도모하는 방법으로 영위되는 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도 그런 처절한 삶의 의지를 허접하게 여기는 것은 죄악일 것이다. 다만 절대로 그래서 안 되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사는 것까지 용인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 모질다.
‘목적 제일주의’의 교졸한 통치술 발휘 바람직하지 않아
문재인 대통령의 파격적인 소통행보와 9년 만의 진보정권이라는 생기까지 겹치면서 국민들의 기대치는 그야말로 고공행진이다. 숫자만을 놓고 본다면 ‘팥으로 메주를 쑤겠다’고 해도 믿음을 놓지 않을 기세다. 새 정부가 이렇듯 국민들로부터 원망(願望)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잘하면 큰 국가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좋은 환경요소 중 하나다. 누구든 문재인정부가 성공해 나라가 한걸음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를 수는 없다.
일단은 정부가 정당한 절차를 통해 정책을 펼쳐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다.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부터 국민 여론이 정직하게 반영돼야 할 것이고, 의사결정 과정부터 민주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목적 제일주의’의 교졸한 통치술이 발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매사가 그렇듯 ‘합법성’이 ‘정당성’을 길이 담보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충족하는 것만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관성이 고질이다.
엉터리 ‘민주 통치’ 위해 동원된 궤변과 억지논리 부지기수
정치사적 경험에 의하면, 독재정권이거나 부실한 정권일수록 마키아벨리의 이론처럼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하려는’ 부조리한 현상을 양산한다. 과거 집권 세력들은 내용적으로는 자기들 마음대로 온갖 권력을 휘두르면서 형식적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엉터리 ‘민주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된 궤변과 억지논리는 계량하기 힘들 만큼 많다.
문재인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에 가속도가 붙었다.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는 거센 반론에도 불구하고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일시중단을 결정했다. 관련업체 관계자, 노동조합, 지역민들의 반발은 물론 전문가들의 반론이 확산일로다. 재적 이사 13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의결 반대자는 비상임이사 한 명뿐이었고, 12명이 신고리 5·6호기 공사 일시중단에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다.
‘탈(脫)원전’ 드라이브, 야릇한 일 간단(間斷)없이 일어나
‘탈(脫)원전’ 드라이브 과정에 야릇한 일들이 간단(間斷)없이 일어나고 있다. 민간전문가그룹 ‘(전력)수요전망 워킹그룹’은 1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회의를 열고 2030년의 예상 국내 전력수요가 2년 전 7차 계획(113.2GW) 때보다 무려 10%(11.3GW)나 줄어든 101.9GW라는 제8차 전력수요 전망 초안을 내놨다. 문재인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의 주요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이는 이 이상한 예측에 대해 일각의 반응이 갸우뚱하다.
정부는 ‘공론화위원회’를 구성, 일정 규모 시민 배심원단을 선정해 신고리 5·6호기 공사 영구중단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맡길 방침이다. 7조원이 넘으리라고 추산되는 매몰비용은 물론, 중동 두바이에 건설하고 있는 원전 등 유망한 수출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거론된다. 벌써부터 ‘공론화위원회’는 절차를 지켰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허울뿐인 거수기에 불과할 것이라는 비관이 나돈다.
정부, ‘탈(脫)원전’ 논란과 우려에 납득할만한 대책 내놔야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이 세계적인 추세와 맞지 않다는 반론도 거세다. 영국과 인도는 2030년까지 각각 16기와 30기의 신규 원전을 건설할 계획이고, 미국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5기의 신규 원전 건설을 허가했다고 한다. 2022년까지 17기의 원전을 모두 폐쇄하기로 한 독일을 모델로 삼는다지만, 예비전력률이 풍부한데다 부족한 전력을 인접 국가에서 쉽게 수입할 수 있는 독일은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세기 동안 피땀으로 쌓은 ‘제3의 불’ 핵발전 기술력이 막 세계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 모든 성과가 일순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라는 걱정도 만만치 않다. 원전 관련 산업계와 해당지역의 피해로 인한 사회적 혼란비용, 전기요금 폭증에 대한 공포 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하루빨리 납득할만한 대책들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서툰 아마추어 정책으로 인한 무지막지한 손실을 너끈히 감내할 처지가 못 된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잣대로 보면 이율배반적인 요소 없지 않아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행할 예정이던 기념우표를 무산시킨 과정도 요상하다. 우정사업본부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12일 심의위원 17명 중 12명이 참여한 가운데 찬반투표를 실시해 발행 반대 8명, 찬성 3명, 기권 1명으로 발행 취소를 결정했다. 지난해 기념우표 발행 심사에는 전체 위원 중 9명이 참석해 만장일치로 발행 결정을 내렸었다. 17명 심의위원들은 작년과 올해 동일하다.
4대강사업, 사드(THAAD)배치, 신고리 원전 5·6호기, 그리고 박정희 탄생기념우표 발행 등관 관련된 일련의 조치들을 일관하는 형식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부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질적 민주주의’의 잣대로 들여다보면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민초들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그러나 마음에는 ‘또렷이 보이는’ 손들이 있는 권력풍경은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청기(靑旗), 백기(白旗) 감춰놓고 무슨 깃발을 올릴까 내릴까 고민하는 공복들이 아직도 존재해서는 안 되련만…….
[저작권자ⓒ 조세플러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헤드라인HEAD LINE
카드뉴스CARD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