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환 한빛고시학원 이사장 “사람을 돕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다”
- 서정현 | suh310@joseplus.com | 입력 2017-12-18 07:57:25
‘즉각실천’
이 작은 문구 하나가 엄청난 무게를 발휘한다는 것 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마음을 먹고 계획을 세운 순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는 것, 누구나 꿈꾸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더욱 이 그 계획에 돈이 소요되고 때로는 상당한 시간, 언제 끝날지 기한 없는 일이라면 실행에 바로 돌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 평생을 ‘즉각실천, 즉각실행’이라는 단어를 신념으로 삼아온 사람이 있다. 목표를 정하면 샛길이 없다.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이어진 기다란 코스를 주저없이 달린다. 대단한 것은 그 과정에서 실패도 넘어짐도 있을 터인데, 결과론적으로 항상 목표에 도달해 있다. 숨을 헐떡이며, 쏟아지는 땀과 열기 속에서도 발은 그가 처음 결심 했던 그 곳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수년 전부터 꿈꾸고 있는 목표는 ‘사람’ 이다. 정확히는 ‘사람을 돕는 사람’이다.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한빛고시학원 경영이사이자 ‘바르게살기 운동 광주동구협의회’ 정영환(63) 회장의 이야기다. 정 회장은 굉장히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첫 인상부터 나이에 비해 젊다는 느낌이 확 풍겨온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은 공연을 하러 다닌다는 것이 그의 첫 인사말이다. 무슨 공연이냐고 물었더니 ‘색소폰 연주’ 공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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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 때 배운 색소폰은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일화다. 그전까지 악기를 다뤄본 적도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무언가 다른 기쁨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악기를 배운 것이다.
지금은 지역 행사에 초청되는 것은 물론, 각종 포럼, 단체, 주민센터 영·호남행사, 로타리클럽,학교동문회, 양로원 등에서 그를 찾는다. 연주 실력은 프로급이다. 놀라운 것은 이 기간에 그가 해냈던 또 다른 일이다. 그는 각종 사진 대전에서 금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휩쓴 사진작가다. 그냥 작가가 아니라 프로작가다. 2014년 사진을 배워보고 싶다는 작은 결심이 3년 여가 지난 지금 그를 제법 알아주는 작가로 성장시켰다.
“2014년에 스타렉스 한 대를 타고 1년간 시간이 나면 전국을 누볐습니다. 모든 공모전에 출품했고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사진을 찍었죠. 자려고 누우면 천정에 사진의 구도가 그려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사진을 찍는 다른 프로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해외 출사를 나갈 정도로 열정적이다. 올해는 아 프리카로 갔다고 한다. 아프리카라니. 비행기로 수십 시간이 걸리는 그 거리를 사진을 찍기 위한 열정 하나로 날아가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의 취미 이야기다. 취미로 시작한 색소폰과 사진으로 프로가 되기까지 그는 다른 일은 안 했을까?
그는 지난 2012년 ‘바르게살기운동 광주동구협의회’ 회장에 취임했다. ‘바르게살기운동’은 시민의 정신혁명을 선도하는 국민운동 단체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창조적으로 바르게 사는 운동을 전개하는 범국민 의식개혁을 실천하는 봉사단체다.
지난 1989년 창립 이래 중앙협의회와 각 시, 도, 군에 협 의회를 두고 있으며, ‘법질서 지키기 캠페인’과 ‘기초질서 확립’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활동을 펴고 있다. 좋은 일이지만 선뜻 나서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무보수 명예직을 넘어 회장 개인이 스스로 기부해야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할 일도 너무 많다. 그는 기꺼이 수락했다. “이웃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삶이 바르게 사는 삶”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추억의 충장축제’에 음식부스를 설치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장학기금과 장애인시설 후원금을 마련하는 등 ‘바르게살기운동 광주 동구협의회’를 크게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주변에서 그의 재임을 원해 두 번 연속 회장직을 수행 중이다. 나아가 그는 동구를 넘어서 광주광역시협의회장으로도 추대되기를 바르게살기 동구회원들은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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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역사회는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행동과 실천이 지속적으로 좋은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믿음이 바탕이 되면 21세기형 공동체 형성이 꿈만 아닐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도움은 여러 분야에 걸쳐서 진행중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은 배우는 학생들이다. 그것은 그가 공무원 취업 전문 학원인 한빛고시학원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을 위해 밤낮없이 책장을 넘기는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이 가진 짐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
“저는 이 학원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경영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경영이란 무엇인가를 늘 고민합니다. 그럴 때마다 답은 늘 똑같습니다. 학원생들을 주인으로 생각할 것, 학원생이 그들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 이 두 명제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가 바로 제 경영의 답이죠.”
잠시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의 현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7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제대 후 택시운전과 일일 노동자 등을 하던 중 친형이 당시 국내최초로 공무원 시험정보센터를 작게 운영하자, 거기에 점원으로 취업했다. 지금으로 보면 공무원 시험준비를 위한 전문서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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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성실하게 일해 서점을 크게 번창시킨 후에 친형이 운영했던 무등고시학원을 38세에 인수하게된다. 막상 경영을 하려하니, 구멍투성이었다. 적자는 물론이고 흑자 가능성도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렵게 모은 돈을 다 털어(심지어 집까지 팔면서) 학원정상화에 나선다. 경영자라고 거드름 피우지 않고 학원 포스터를 본인이 붙이고 다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토바이를 몰고 나가 자신이 붙여놓은 포스터 위에 다른 포스터가 붙어 있으면 새로 붙이기를 반복했다. 강사들에게도 “학원생들이 학원의 주인입니다. 그들이 있어야 당신들도 있습니다”를 강조하면서 취업률 높이기에 매진했다.
그의 노력은 몇 년 안에 곧 빛을 발했고 무등고시학원은 순식간에 정상화를 넘어 지역 공무원 학원중에 톱 클라스로 성장했다. 그러자 친형이 경영권을 넘겨달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두말도 없이 넘겨줬다. 그리고 세운 것이 지금의 한빛고시학원이다.
한빛고시학원을 세울 때도 그의 뚝심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자리를 잡은 한빛고시학원은 전남대 쪽문 앞 주택가였다. 처음 학원은 그렇게 크지 않은 데다 학원 소음 탓에 주변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학원을 내놓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려했는데, 학원을 인수하기로 한 후배가 우여곡절 끝에 이를 거절했다.
정 회장은 거기서 “어차피 우회가 안 된다면 정면 돌파밖에 없다”며 인근 부동산 업자를 찾아 학원 근처 주택 여러 채를 동시에 매입하겠다고 말했다. 가격도 충분히 쳐주겠다고 했다. 상당한 모험이었다. 그렇게 늘린다고 학원생이 늘어난다는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 매입 가격이 상당했다.
하지만 한번 결심을 굳힌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정확하게 일주일 뒤 부동산에 앉아 한 시간 간격으로 현 학원의 부지인 주택들을 매입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한빛고시학원은 지역 학원 중 취업자 배출 1~2위를 다투는 명문학원으로 성장했다. 경영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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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가장 큰 행복은 자식 자랑입니다. 취업 준비생들이 부모 앞에 당당하게 합격장을 내밀 수 있도록 돕는 게 저의 일이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쾌적한 환경, 최고의 강사진을 지원해 한 사람도 낙오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 학원이 지금처럼 성장하게 된 원동력입니다.”
여기에 가난한 청춘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을 지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는 “과거 한 학생이 찾아와 당당하게 ‘돈은 없지만 희망은 있다’며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에게 청소 등을 하게 하는 대신 학원비를 받지 않고 강의를 듣게 했더니 1년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요. 얼마나 내 일처럼 기뻤던지.”라고 했다.
한빛고시학원 뿐만 아니라 바르게살기운동 동구협의회에서도 그는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만들고 지역 학생들에게 지원하고 있다. 이 뿐이 아니다. 그는 42살에 만학을 시작 광주지역 모 대학교에 입학한다. 이미 그때는 학원 대표라는 명함도 있었고 공부에 신경을 쓸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을 쪼개가면서 4년제 대학교를 졸업했고 내친 김에 대학원에서 석사까지 취득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끝내 박사학위까지 손에 쥐었다.
이제 아들에게 학원 경영 전반에 일을 맡기고 지역에서 또 다른 자신의 일을 찾아 이웃돕기에 나서고 있는 정 회장. 그가 꿈꾸는 세상은 명확하다. 지역민들이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낙오하는 젊은이나 소외된 아이없이, 또 병들고 버림받는 이들이 없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그것을 관이 아닌 민간의 힘으로 이루는 것.
“앞으로 또 제가 뭘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목표를 결정했다면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릴 거라는 겁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참 열심히 살아왔구나 싶으면서도 뭔가 허전합니다.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는데, 제대로 돌려주지 못했다는 허전함이지요. 이제 또 다시 시작해야죠. 사람을 돕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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