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역사에서 보듯이 화폐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얼마나 탄탄하게 조직적으로 잘 유지되는지가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 뿐만이 아니다. 권력과 부채, 신용(화폐)이 창출되는 사회적인 관계가 잘 조직되고 유기적으로 돌아가게 되면 국가는 신용화폐와 국채의 발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그렇게 조달된 자금으로 국민경제 수준을 높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에 따른 조세 수입이 증가하게 되어 부채상환이 가능하고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선순환구조가 돌아갈 수 있다. 반면에 이런 관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면 국채 발행이 결국 빚으로만 남는다. 조세수입도 늘지 않고 그러다 보면 빚을 내어 빚을 갚는 악순환구조가 된다. 그 결과 국가는 점점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돈이라는 것은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만큼 경제수준에 따라 계속 만들어져야 하고 팽창이 되어야 한다. 역사를 볼 때 그 사회적 관계가 잘 유지되는 경우 사회가 부강해지고 국가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반면,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화폐발행 과정에서 사회적 관계가 뒤틀리는 경우 작게는 사회의 파탄에서 크게는 제국의 붕괴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있다.
로마 제국이나 동양의 원 제국부터, 18세기 프랑스와 20세기 독일, 프랑스 혁명에서 국가의 흥망성쇠는 결국 화폐를 둘러싼 정부(왕정), 납세자(국민),행정조직의 사회적 관계가 건전하게 유지되었는가 아닌가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신용, 화폐화 그리고 세금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 중의 하나는 신용화폐의 탄생과 사용이 아주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용화폐란 신용(채무)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돈을 말하는데 이 신용화폐의 급증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헨리 포드(1863~1947)는 “국민들이 은행과 통화체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다행스런 일이다.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면 오늘 밤에 당장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은행이 뭔가 커다란 음모를 숨기고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자본주의 체제는 일반 시중은행에서 해주는 대부나 민간 기업들이 발행하는 어음처럼 수많은 유형의 사적인 채권-채무 관계를 화폐로 둔갑시키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화폐를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화폐와 구분하기 위해 유사화폐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유사화폐는 신용을 화폐화한 것인데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화폐의 탄생 경로
화폐가 탄생하는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맨 처음 단계로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발권하는 법정화폐(본원통화)가 있다. 이것은 모든 화폐의 기준이 된다.
두 번째 단계는 본원통화를 기반으로 해서 일반시중 은행이 지불준비금 일부를 남기고 대출을 해주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화폐가 있다. 일반적으로 예금통화라고 한다. 은행이 우리에게 발행해주는 수표는 한국은행에서 탄생시킨 원조 화폐는 아니지만 돈처럼 똑같이 주고받으며 사용하니 돈이라 해도 상관없다.
세 번째는 민간인(주로 기업)이 탄생시키는 돈이다. 예를 들면 A라는 기업이 하청업체 B에게 일을 시키고 어음을 끊어주었다고 하자. 이 어음은 A가 B에게 사적인 채무관계를 지고 있다는 증표이다. 어음은 처음에는 단지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은행에 가면 할인을 하고 돈으로 바꿀 수가 있고, 어음 자체가 직접 돈처럼 지불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니 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따라서 어음은 신용(사적 채무관계)이 화폐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사적인 채무계약을 증거하는 수표, 카드, 채권, 약속어음, 상품권 등 수많은 유형의 증표들, 즉 유사화폐는 채무자가 이 증표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그 증표에 기입한 금액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지불약속이다.
한국은행의 5만 원 권은 정부가 5만 원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이고, 은행이 발행하는 10만 원권 수표는 은행이 그 금액만큼 책임지겠다는 지불약속이다. 마찬가지로 A기업이 발행한 어음이나 상품권 역시 그 기업이 책임지고 빚을 갚거나 물건과 교환해 주겠다는 지불약속이다. 물론 이 채무에 대한 지불약속의 신뢰도에 따라 각기 다른 이자율이나 할인율이 적용된다.
수많은 유형의 유사화폐가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 모든 화폐의 제왕은 법정화폐이다. 법정화폐도 일종의 지불약속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최고의 신뢰성을 바탕으로 힘을 갖게 되는 것은 국가가 세금으로 지불약속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가 화폐로 지정하였다고 모두 완전한 화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완전한 화폐가 되려면 충분조건이 더 갖추어져야 한다. 화폐에 생명을 불어넣는 충분조건은 바로 국민의 신뢰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앞서 역사에 나타난 사례에서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공평과세가 되기 위하여
사적인 채무를 나타내는 유사화폐는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최종적으로는 그것이 국가가 찍어낸 법정화폐로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보장되면 그 사적 채무도 화폐의 위치에 오르면서 다른 물품과 교환되고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사적채무가 법정화폐와 교환되는 과정에는 중앙은행이 참여하게 된다. 중앙은행은 여러 형태의 유사화폐들을 받아들이고 법정화폐를 내어준다. 즉 채무를 매입하고 화폐로 교환해주는 과정을 통해 사적채무들을 화폐로 탈바꿈시키고 통화량을 증가시킨다. 이렇게 늘어난 통화량은 정부가 통제하는 통화량지표에는 빠져있게 된다. M1, M2라는 통화량지표는 금융권이 만들어내는 유사화폐만 들어있고 민간부문이 창출하는 것은 빠져있다. 민간부문이 만들어내는 유사화폐는 아예 화폐로 쳐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부분의 규모가 월등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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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렬 강남대 경제세무학과교수 |
한편, 신용이 화폐화될 때에는 유사화폐들의 서열이 정해진다. 왕 가까이에 높은 대신이 도열하는 것처럼 법정화폐에 가까울수록 서열이 높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유동성이란 용어는 얼마나 빨리 현금화할 수 있는가의 의미인데, 수표처럼 유동성이 큰 유사화폐는 그만큼 법정화폐에 가깝다는 뜻이다. 서열이 높은 유사화폐를 만들 수 있는 기관은 경제생태계에서의 위치도 그만큼 높다. 그래서 수표를 발행할 수 있는 은행권은 경제계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유사화폐를 창출할 수 있는 대기업도 강자이다. 반면에 중소기업은 화폐를 거의 만들지 못하는 약자이다.
세금이 공평하려면 담세력에 따라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담세력을 측정할 때는 ‘법정화폐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만을 본다. 담세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만들 수 있는 힘’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돈’은 과표에서 빠져있다. 이런 면에서 대기업은 중소기업보다 이미 세부담 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글/ 박일렬 강남대 경제세무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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