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칼럼] ‘벼락치기 입법’의 전당(殿堂)

편집국 | news@joseplus.com | 입력 2018-03-16 1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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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본사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입법부의 가치는 대단히 높다

. 국민의 손에 의해 뽑힌 국회의원들의 존재유무와 그 권능의 폭은 그 나라 민주주의의 척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는 기본적으로 입법권, 재정권, 국정통제권, 자율권의 원칙에 의해서 삼권분립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이 중 입법권이야말로 국민들의 삶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기능이다. 현대정치에 있어서 국회의 입법기능이 원활한가, 아닌가는 민생의 질에 곧바로 연결된다.

 

국회를 일러 흔히들 민의의 전당이라고 부른다.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뽑힌 국회의원들에 의해 민심이 수렴되고 수렴된 여론을 바탕으로 적절한 입법기능을 통해 국민들 삶의 수준을 높일 책임이 바로 국회에 있다. 재정권, 국정통제권, 자율권 모두가 중요하지만, 입법능력의 중요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유럽 등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국회를 법률생산 공장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우리 국회, 생산성으로 평가할 때 형편없는 불량공장

 

법률생산 공장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국회는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면, 생산성으로 평가할 때, 벌써 백 번도 더 문을 닫았어야 마땅할 형편없는 불량공장이다. 민생을 헤아려 시급히 다루어야 할 법률들을 선별하여 효율적으로 처리해내는데 있어서 영락없는 낙제감이다. 우리 국회는 최상의 법률을 적시에 생산해내는 우수한 공장이 결코 아니다. 국민들로부터 좀처럼 비껴나지 못하는 무용론(無用論)’ 힐난이 이를 반증한다.

 

국회는 2월 임시국회 첫날 본회의에서 소방기본법 개정안, 도로교통법 개정안, 소방시설공사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제천·밀양 화재 참사가 잇따라 터지고 난 뒤인 이날 국회는 14개월 동안 방치했던 소방안전 관련 법안들을 4시간 만에 처리했다. 소방기본법 개정안은 일정규모 이상 공동주택에 소방차 전용 주차구역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이 구역에 주차하거나 진입을 방해하면 100만 원이하의 과태료를 물리도록 하는 내용이다.

 

국회, 국민들이 수두룩 죽어나가야 비로소 벼락치기로 일해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소방시설 주변 주정차를 금지하고, 다중이용업소 주변을 주차금지 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게 했다. 또 소방시설공사업법은 건축자재 등의 방염 처리능력을 소방청장이 평가·공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진작 했어야 할 법안 심의와 결의를 하염없이 미루고 미루다가 벼락치기 공부하듯 후다닥 처리해 넘기는 국회의 못된 관행은 그 뿌리가 깊고도 깊은 고질병이다.

 

국회는 제때에 처리해야 할 법안들을 마냥 미루다가 대형사고가 터져 국민들이 수두룩 죽어나가야 비로소 벼락치기로 통과시킨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일련의 법안들만 해도 그랬다. 국회는 해사안전감독관제를 도입해 해양 안전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내용의 해사안전법 개정안을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 부랴부랴 처리했다. 이 법안은 전 해인 201312월 발의됐던 법안이다.

 

대형 재난 안전사고 터진 뒤 부랴사랴 처리한 법 부지기수

 

또 이른바 수학여행안전법으로 불리는 학교 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법 개정안은 20138월 고교생 5명이 사망한 태안 해병대 사고를 계기로 발의됐지만 8개월이나 국회 캐비닛에 잠들어 있었다. 이 법은 수학여행 등을 실시할 때 학교장이 안전대책 마련 등 필요 조치를 강구하도록 명시한 법으로서 세월호 참사로 수많은 학생들이 수장된 이후인 2014429일 해사안전법 개정안과 함께 처리됐다.

 

지진 관련법안 처리과정도 판박이였다. 정부와 국회의원들은 20169월 경북 경주 강진이 발생하자 지진 안전관련 법안을 앞 다퉈 발의했다. 비건설업자인 건축주의 직접 시공 범위를 제한하는 건설산업기본법 개정안과 내진설계기준 적용대상 시설 확대, 원자력발전 시설과 관련된 지진·화산 재해 대책법 개정안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법안 역시 수개월씩 국회에 묶여 있다가 201711월 포항 지진 이후에야 황급히 처리됐다.

 

수험과목만 잔뜩 적어놓고 공부는 안 하는 못된 수험생 꼴

 

성폭력 범죄 관련법도 다르지 않았다. 성폭력 전과자의 출소 후 범죄가 이어지자 정부는 2009년 전자발찌 착용 기한을 늘리는 등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특정 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 역시 20102월 부산 여중생 납치살해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 달여 만에야 겨우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처럼 국회는 주기능인 민생치안법안을 처리하는데 느림보 거북이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어디가 어떻게 고장이 났기에 대한민국 국회라는 법률공장은 이다지도 생산성이 형편없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국회의원들이 법안발의건수에만 신경을 썼지 신속하게 제대로 처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법안을 발의했노라고 언론에 자랑질하기에만 바쁘다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수험과목만 잔뜩 적어놓고 공부는 안 하는 못된 수험생 꼴이다.

 

법안을 당파싸움 흥정거리로 삼는 만행 하루빨리 근절돼야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소아병적인 심성에도 기인한다. 죽고살기 식 정쟁구조 속에서 정당끼리의 경쟁은 물론 이웃 국회의원들끼리도 남의 입법실적에 대해서 시기질투를 벌인다. 특히 여야 쟁점이 첨예한 법안일 경우는 적의(敵意)만 살아 펄펄 날뛰는 격투기의 펜타곤을 방불케 한다. 상대 당이 좋은 입법으로 민심을 얻는 꼴을 죽어도 못 보는 고약한 정치풍토가 작용하기도 한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비극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법률은 민초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국가의 엄중한 장치다. 잘못됐거나 허술한 법 때문에 국민들은 밤낮으로 죽어나자빠지는데, 정치꾼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 유불리만 따지면서 미적대는 일은 주권자에 대한 중대한 범죄다. 민생법안을 당파싸움의 흥정거리로 삼는 냉혹한 만행은 하루빨리 근절돼야 한다. 살다보면 벼락치기 공부가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국회에서 번번이 그래선 안 된다. 국회는 벼락치기 입법의 전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의의 전당으로 거듭남으로써 존재이유를 확실히 입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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