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칼럼] ‘공약(空約)’의 덫
- 편집국 | news@joseplus.com | 입력 2017-05-17 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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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휘 본지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
지난 19대 대통령선거에서 바른정당 대통령 후보로 활약했던 유승민은 좀처럼 나오기 힘든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인물이다. 그의 명민함과 곧바른 기질은 정치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자질이다. 지난 2015년 2월초 여당의 새 원내대표로 당선됐을 때, 민심의 기대가 컸던 것도 일찍이 유승민의 높은 역량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유승민이 불과 5개월여 만에 원내대표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는 불의의 운명을 맞닥트린다.
충신 알아보지 못해 쫄딱 망해버린 군주들 비일비재
유승민을 위기로 내몬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불협화음 폭발지점은 같은 해 4월 8일 그가 국회에서 한 ‘대표연설’이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서슴없이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송죽같이 꼿꼿한 ‘선비기질’에서 기인한다. 유승민은 “134.5조원의 공약가계부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고 고백했다. 또 “지난 3년간 예산 대비 세수부족은 22.2조원”이라면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유승민은 이 연설에서 평소 자신이 갖고 있던 소신과 함께 새누리당이 펼쳐가야 할 ‘개혁적 보수’의 지향점을 일목요연하게 펼쳐보였다. 경제전문가로서 “성장잠재력과 상관없는 단기부양책이 아니라 사회적 대타협에 필요한 곳에 예산을 써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이 연설은 보수정당의 변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이례적으로 야당까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청와대만은 유승민의 생각을 허락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선출직 원내대표 생목 자른 일, 박 전 대통령 비극 시발점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라며 유승민을 콕 집어 비난했다. 결국 유승민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양심고백을 한지 13일 만에 원내대표 직에서 밀려났다. 퇴임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는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의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비장한 말을 남겼다. 지난해 20대 총선 공천에서도 배제된 그는 천신만고 끝에 무소속으로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집권당 국회의원들이 집권당 원내대표의 생목을 잘라낸 당시의 일은 오늘날 박 전 대통령을 탄핵의 수렁에 빠트리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게 한 비극의 시발점이었다. 민주적 정당정치의 근간을 깔아뭉갠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자기들이 뽑은 원내대표를 삿대질해 밀어낸 친박을 중심으로 한 당시 새누리당의 몰상식한 행동은 스스로 공당(公黨)이기를 포기한 망발의 절정이었다.
새 대통령 일상에 감동…‘불통’과 ‘비상식’ 깊은 그늘 반증
신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하늘을 찌른다. CBS의 의뢰로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19대 대통령 선거 직후 실시한 주간집계 조사 결과 문재인 정부가 국정 수행을 ‘잘할 것’이라는 응답은 무려 74.8%(매우 잘할 것 41.6%, 대체로 잘할 것 33.2%)로 나타났다. 잘 못할 것(매우 잘 못할 것 6.3%, 별로 잘 못할 것 9.7%)이라는 답변은 16%에 그쳤다. 국민들의 관심을 반영하듯 언론들도 청와대 소식을 실시간으로 낱낱이 전하고 있다.
인사나 정책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이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문 대통령의 출발에는 산뜻한 일들이 많아 보인다. 청와대 관저에 걸어서 출근하는 입주한 대통령과 이를 배웅하는 부인 김정숙 여사의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뭉클해 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그런 일상에 국민들이 감동하는 일은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지독한 ‘불통’과 ‘비상식’의 깊은 그늘에서 찌들어왔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화려한 오프닝 쇼만으로 끝나는 연극은 없어
요 며칠 사이에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히는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을 비롯한 최재성·정청래 전 의원 등 문 대통령의 핵심 참모들이 2선 후퇴의사를 밝힌 일이 있었다. 그 전에는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할 일을 다 했다”며 대통령 취임식 날 해외로 떠난 일도 있었다. 양 전 비서관의 토로처럼 “나서면 ‘패권’이요, 숨으면 ‘비선실세’” 소리를 듣는 형편에서 그들의 선택은 수긍이 간다. 하긴 측근들이란 언제고 다시 뛰어들면 되는 자리에 조용히 있기만 해도 될 호시절이긴 하다.
그러나 화려한 오프닝 쇼만으로 끝나는 연극은 없다. 이제부터 펼쳐질 파란만장 드라마가 관건이다. 흔히 말하는 ‘허니문’ 기간조차 제대로 짐작되지 않는 전운(戰雲)이 여의도의 하늘에 잔뜩 끼어 있다. 홍준표, 안철수 대선주자들의 흔쾌한 ‘승복’ 표명도 기억에 뚜렷하지 않다. 혹독한 인사검증을 벼르는 야권의 기세는 날로 승승하다. 공언해온 약속들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를 놓고 몰아칠 폭풍은 충분히 예고되고 있다.
공약(空約)의 덫에서 하루빨리 발을 빼는 것이 지혜
문 대통령의 공약사업에 소요되는 예산은 모두 합쳐 연평균 35조6천억원, 5년간 총액은 178조원으로 추산된다. 우리는 이미 2012년 대선을 통해 덜컥 도입된 3~5세 아동의 누리예산 4조원도 만들어내지 못해 지난 4년 내내 벌어진 여야의 혈투를 지켜봤다. 한국은 이미 솜을 가득 싣고 강을 건너는 당나귀의 운명이 될 위기에 처한 부채대국으로 가고 있다. 어쩌면, 많은 공약을 했지만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고해성사의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유리할 지도 모른다.
문 대통령의 성패는 국민들로 하여금 ‘공짜점심은 없다’는 진실을 깨닫도록 하는 설득에 성공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데 대한 책임과 비난을 집권당과 함께 나눠지고자 했던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유승민의 원려(遠慮)를 엉뚱하게 ‘배신’으로 몰아 때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우매한 아집이 초래한 비운이 타산지석이다. 공약(空約)의 덫에 걸려들었다면 하루빨리 발을 빼는 것이 지혜다. 물론, 당선이 되기 위해서 한 말들과 지킬 수 있는 약속이 다르다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을 국민들이 다 참아줄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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