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칼럼] ‘강 건너 불구경’ 좀 그만 하시라
- 김영호 기자 | kyh3628@hanmail.net | 입력 2017-09-21 17: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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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본사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
‘타워링(TOWERING)’은 부실공사로 지어진 초고층 빌딩의 화재를 다룬 미국의 유명한 영화다. 건축가인 로버트(폴 뉴먼)가 자신이 설계한 초고층 빌딩의 준공식에 참석한 날, 부실공사로 인해 화재가 발생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되지만 이미 화재는 시작된다. 건물관리 책임자인 마이클(스티브 맥퀸)이 소방대원들과 함께 인명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불은 대형화재로 번지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다.
영화는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숨 막히는 장면을 연출하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은 건물옥상에 있는 대형 물탱크를 터뜨려 화재를 진압하고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한사람의 그릇된 탐욕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고전(古典)이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1971년도에 사망 163명, 부상 6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남긴 우리나라의 ‘대연각 화재사건’이었다니 씁쓸하기 짝이 없다.
퇴직 앞둔 베테랑.새내기 소방관 함께 희생당해
지난 17일 두 명의 고귀한 소방관들이 화재진압 현장에서 숨졌다. 이날 새벽 강릉 석란정 화재 진압 중 이영욱 소방위(59)와 이호현 소방사(27)가 순직했다. 두 소방관은 기와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화마와 싸우다가 변을 당했다. 30년째 한 길을 걸어온 최고참인 이 소방위는 퇴직을 1년여 앞둔 상태였고, 임용 8개월 차 새내기인 이 소방사는 결혼식을 앞둔 예비신랑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평생 소방 외길을 고집했던 한 가정의 아버지인 이 소방위는 ‘퇴직 준비’를 하라는 배려도 마다하고 현장근무를 자청해 새내기와 한 조를 이뤘다. 이날도 제일 먼저 현장에 달려간 바람에 그는 ‘퇴직하면 요양원에 있는 노모를 매일 모시고 싶다’는 꿈을 이룰 수 없게 됐다. 고시원 쪽방에서 2년간 시험에 매달려 가까스로 소방관이 된 팀의 막내 이 소방사는 간절히 소망했던 소방관 생활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스러졌다.
소방공무원 평균수명 일반인들보다 약 20여년 짧아
뉴스나 영화 속에 나오는 소방관들은 멋있다. 한때 미국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1순위를 차지하기도 한 직업이 소방관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소방관들의 현실은 어떨까. 2013년 보건복지부 조사 기준, 한국 남성 평균수명은 78.5세다. 하지만 소방공무원의 평균수명은 58.8세로 약 20여년이 짧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퇴직한 소방공무원의 평균 수명은 공무원 전체 직군 중 가장 짧다.
지난 2010년부터 2014년까지 각종 사건·사고로 순직한 소방관은 33명이다. 반면, 자살한 소방관은 이보다 2명 더 많은 35명이다. 이들 중 19명은 우울증 등 신병비관을 이유로 세상을 등졌다. 소방관의 10.8%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 일반인 우울증 유병률(2.4%)의 4배에 달하는 수치다. 알코올 사용 장애도 일반인(3.2%)보다 6배 이상 많은 21.1%를 기록했다. 소방관 21.9%가 수면장애로 고통 받고 있다. 이 역시 일반인(6%)의 3배 가까운 수치다.
소방인력 태부족 현상이 온갖 비극의 시발점
소방관 3명 중 1명꼴인 34.4%(73명)가 PTSS(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악몽, 환각, 불면 등의 정신적인 증상)를 경험한 것으로 밝혀졌다. 소방관들은 1인당 평균 6.36건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는 등 간접적 트라우마(92%), 업무 중 부상이나 위협 등의 직접적 트라우마(70.8%), 동료의 사망이나 자살, 심각한 부상 등 동료와 관련된 트라우마 (56.6%) 등이 소방관들을 괴롭히고 있다.
2015년 소방인력은 총 3만1천306명(3교대 인력)이다. 정부가 정한 소방력 기준 5만1천143명에 비해 1만9천837명이 부족하다. 2016년 1월 기준, 소방관 1인당 담당 인구수는 1천210명이며, 주당 평균 근무시간(3교대 기준)은 56시간이다. 미국은 소방관 1인이 1천75명을 담당하며, 프랑스는 1천29명, 일본은 820명을 맡는다.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 소방관 1인이 390여 명씩을 더 책임져야 하는 형편이다.
우리 소방관들 희생정신, 서비스, 책임성 ‘세계 제일’
주당근무시간은 프랑스 48시간, 홍콩 48시간, 일본은 40시간이다. 한국 소방관들은 일본에 비교하면 주당 16시간씩 더 일하는 셈이다. 인력부족에 따른 ‘과도한 근무’와 잦은 ‘공무상 사망·부상’이 소방관들의 수명을 줄이는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소방관들의 희생 사고가 불거질 적마다 정부와 정치권이 나서서 개선하겠다고 떠들지만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권력게임에만 몰두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 소방관들의 희생정신, 시민을 위한 서비스, 책임성은 ‘세계 제일’이다. 고장 난 대문도 고쳐주고, 닫힌 자동차 문도 열어주고 심지어 아파트 형광등도 교체해달라는 119신고에도 출동한다. 그런데도 부상 소방관들을 위한 국립소방병원 하나 없다. 방화복 품질도 형편없다. 장비도 녹슬었다. 신분도 지방직이라 장비나 처우도 지자체들마다 들쭉날쭉하다. 소방사 기본급은 180만원이고 여기에 수당 13만원이 고작이다.
고관대작 정치인들, 이젠 제발 119 좀 제대로 갖춰주시라
지난 6월 5일 ‘소방청’이 다시 독립한 것은 새로운 변화의 긍정적인 조짐이다. 무엇보다도 소방인력의 개편이 단행돼야 한다. 지방직에서 국가직으로 변경하고 인력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지자체마다 장비나 서비스가 다르다는 시실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모독이다. ‘국립소방병원’ 신설도 반드시 필요하다. 소방장비의 선진화와 소방관 보수 및 화재수당의 대폭적인 처우개선도 뒤따라야 한다.
‘911’을 보면 ‘119’가 보인다. 400여 개의 기관에서 우수한 소방인력을 배출하고 있는 미국의 선진시스템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체력시험강화, 자격증소지자 의무화, 소방 관련학과 특채 등 입직단계의 전문성을 중시해야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 동안 나라님을 비롯한 고관대작 정치인들께서는 ‘간 건너 불구경’을 너무 오래 하셨다. 이젠 제발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119를 제대로 갖춰주셔야 한다. ‘한 인간의 생명가치는 온 지구의 무게보다도 더 무겁다’는 귀한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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