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칼럼] ‘생일’ 놓고 싸우는 이상한 나라

편집국 | news@joseplus.com | 입력 2017-08-21 10:41:04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안재휘 본사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우리 주변에는 자기 정체를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 속에 버려졌거나, 부모가 헤어지면서 고아원에 맡겨졌거나, 전쟁 통에 부모의 손을 놓쳤거나 한 사람들이다. 개중에는 머나먼 이국땅으로 입양돼 언어마저 잃은 사람들도 없지 않다. 모국이라고 찾아와 한국말을 서툴게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짠하다. 

 

 

대한민국의 생일을 놓고 정치권이 또 한바탕 케케묵은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갈등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8년이 아닌 1919년에 이뤄졌다는 점을 부각했다. 잠복해있던 분란의 섶에 불똥을 던진 것이다.

 

문 대통령, 잠복해있던 분란의 섶에 불똥 던져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이 즉각 브리핑을 통해 “너무 당연한 1948년 건국을 견강부회해서 1919년을 건국이라고 삼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며 “1948년 건국은 자명한 일이고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반박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스스로 19대 대통령이라고 하면서 국민·영토·주권이라는 국가 성립요건이 불비했던 1919년 건국을 이야기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임시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2019년 건국 100주년을 선언한 것은 우리 현대사를 명쾌하게 정리하는 역사적 정의, 즉 히스토리컬 데피니션(Historical Definition)”이라고 말했다. 추 대표는 또 “이명박, 박근혜정부는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외면했다”며 “심지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 했고, 역사 국정교과서를 통해 1948년 건국절을 기정사실화, 공식화하려고 했다”고 비판했다. 

 

각 정당 모두 나서서 날 세운 채 중구난방 시끌벅적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좌파 진영이 1919년 상해 임시정부를 처음 만들었을 때를 건국일로 보는 것은 북한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며 “남한 정부, 한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기 위해 1919년 상해 임정 수립을 건국절로 하자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당 혁신위원회는 이미 혁신선언문에서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 이래 자유민주 진영이 피와 땀으로 일으켜 세우고 지켜온 나라”라고 명시한 바 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정의당도 각각 목소리를 내며 입장을 드러냈다. 박주선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문 대통령의 1919년 건국론에 대해 “대한민국 건국일은 그때(1919년)다. 헌법에도 그렇게 규정돼 있다”며 동의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는 “문 대통령은 건국절 논란을 재점화해 역사의 문제를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국민분열을 자초했다”며 “역사는 특정 정권이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고 비판했다.

 

대통령 바뀔 적마다 ‘생일’ 달라지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건국절 논란은 11년 전인 2006년 8월 이영훈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제목의 칼럼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후 ‘건국절’이라는 용어는 역사학계에서 처음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이명박 정부 시절의 ‘대한민국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 구성과 헌법소원 반발, ‘건국절’ 법안 국회제출과 철회 소동, 국정교과서에 ‘대한민국 수립’ 명기 결정과 반발 등 논란이 줄기차게 이어져왔다.   

 

우리 사회는 ‘1919년 건국’과 ‘1948년 건국’이 ‘좌파’와 ‘우파’의 전유물이 돼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인 양 날카롭게 대립하는 층돌이 지속되고 있다. 이념대결의 도마 위에 나라의 생일마저 올려놓고 사생결단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대통령이 바뀔 적마다 ‘생일’이 달라지는 나라는 또 어디 있으랴. 아니, 도대체 이 같은 소모적인 논란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지금이 이렇게 한가로운 시절인가. 

 

좌파, “친일파를 건국 주역으로 탈바꿈하려는 ‘역사 세탁’” 맹비난

 

1919년을 건국일로 보는 사람들의 논거는 이렇다. 우선 제헌헌법 전문에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돼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발행 일자가 찍힌 1948년 9월 1일 최초 관보 등도 주장의 뒷받침으로 대두된다. 이들은 1948년 건국설을 헌법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성과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반역자인 친일파를 건국의 주역으로 탈바꿈하려는 ‘역사 세탁’이라고 비난한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998년, 대한민국 50년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건국 50년사’를 언급했고,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지난 2007년 광복 62주년 경축사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가리켜 “3년 뒤 이날, 나라를 건설했다.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1919년을 건국일로 보는, 주로 좌파 진영의 사람들은 이 대목에 대해서 명쾌하게 해명해야 한다. 김.노 두 대통령이 무지했던지 실수했다고 말해야 할 판이다. 

 

견해가 갈린다면 국민적 총의와 합의를 차분히 모아나갈 문제

 

건국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견해가 갈린다면 그것은 국민적 총의와 합의를 차분히 모아나갈 문제다. 어느 일방이 선언하고 끝낼 수 있는 사안이 결코 아니다. 기왕에 정리가 안 된 문제라고 하면 이것 역시 공론화해서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물론 좌파 대통령이니까, 그 주장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경축사에서 선언해버리는 방법으로 과거 우파 대통령들이 해왔던 오류를 답습할 이유가 왜 있었을까 아쉽기 짝이 없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북.미간 대결로 인해 한반도는 위태로운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다. 이 엄중한 시점에 대통령이 이념대결을 덧내기 십상인 ‘건국일 논란’을 촉발시킨 데는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을까. 혹여 출렁거리는 민심을 조금이라도 돌려보려는 계산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지금 우리의 처지가 이처럼 엄중한데, 한가로운 ‘생일’ 논쟁이라니 참으로 가당찮은 작태다. 참말로, 시방 ‘뭣이 중한디’ 이 어리석은 난장인가 그 말이다. 

    

[저작권자ⓒ 조세플러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naver
  • 카카오톡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편집국 다른기사보기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헤드라인HEAD LINE

카드뉴스CARD NEWS